(Preface: This posting is written in Korean. 본 글은 2019년 4월에 본인이 작성한 글입니다. 본 글에서 언급되는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융합과학부는 2012년에 나노융합학과, 디지털정보융합학과, 지능형융합시스템학과를 통합하여 설립되었으며, 2020년 지능정보융합학과와 응용바이오공학과가 신설되며 소멸하였습니다.)
作名은 중요하다. 부모 혹은 설립자의 소망과 의지가 담겨있는, 개인이나 단체의 이름을 정하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명소는 언제나 흥한다. 학과/학부 및 대학의 이름도 예외는 아니다. 그 학과/대학의 철학, 다루는 학문의 범위, 또한 대내외적인 이미지 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 가정대학이 생활과학대학으로 1997년에 명칭을 변경한 것이 좋은 예이다.
서울대학교에는 100개 이상의 학과가 있다. 이러한 학과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해당 학과의 영역과 중점분야를 정의한다. 서울대학교 학과의 작명은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 단일 학문 영역을 나타낸다. 의학과가 좋은 예이다. (물론 의학의 영역은 매우 넓다. 하지만, 의학이라는 단어는 사람을 치료하고 건강한 삶을 연장시키기 위한 일련의 학문 영역을 직관적으로 나타낸다.)
둘째, 복수의 학문 영역을 나열하는 것이다. 예로, 국어국문학과는 국어학 및 국문학을 다루며, 정치외교학부는 정치학 및 외교학을 다룬다.
셋째, 소주제와 대주제를 나열하여, 세분화된 학문 영역을 보다 명확히 드러낸다. 재료공학부는 공학이라는 학문 영역의 일부로, 현재 널리 사용되는 물질의 특징을 향상시키고 새로운 물질을 연구하는 재료공학을 다룬다. 또한, 수리과학부는 과학의 일부인 수학(수리과학)을 다룬다. (물론, 수학이 과학의 일부인지 아니면 같은 위상의 다른 학문 영역인지에 대한 이견은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학과라는 단위는 영속적인 것이 아니다. 최초의 학자들에게 학문 분야의 구분은 무의미했으며, 학자들은 다방면을 두루 섭렵하여 학문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진부한 예를 들지 않더라도, 한 명의 학자가 철학자이자 수학자, 또한 물리학자이자 예술가인 것이 근대까지도 흔했다. 현대로 넘어오면서 학문의 분화가 심화되고, 그에 따라 다수의 세분화된 학문 영역의 기틀이 잡혀갔으며, 각각을 중점적으로 연구/교육하는 학과가 설립된 것이다. 한편 학문의 발전에 따라 자연스레 인접 학과 간 영역의 중첩이 발생하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며 학문의 발전을 가속화 시켰다. 이 과정에서 떠오르는 분야가 새로운 학문분야, 나아가 학과가 되기도 하였으며, 기존 학과들이 합쳐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학과의 흥망성쇠 자체가 학문의 본질이자 역사이며 학문의 발전 그 자체인 것이다. 학과의 명칭은 이와 같은 큰 흐름 속에서 해당 학문 연구의 본류를 적확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위에 기술한 학과 작명 분류법을 기준으로 보면, 융합과학부는 세번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과학의 일부 분야인 융합과학을 다룬다라고.
하지만, 융합과학은 다른 학문분야와는 달리 여전히 매우 넓은 분야를 포함한다. 재료공학과 非재료공학을 비교해보면, 非재료공학이 훨씬 더 넓은 영역을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반해, 융합과학과 非융합과학의 경우, 여전히 융합과학의 영역이 훨씬 더 넓게 느껴진다.
융합과학을, 문제의 탐구에 있어 하나의 과학적 기법이 아닌 복수의 과학적 기법으로 접근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순수 기초과학(즉 수학, 물리학 등)을 제외한 모든 과학(사회과학 포함)을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학에서도, 화학물리, 물리화학, 생화학 등 문제의 탐구에 여러 분야의 지식을 활용하는 것이 보편화되는 것을 고려한다면, 거의 대부분의 과학이 융합과학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서 서울대학교 융합과학부, 또한 융합과학기술대학원의 문제가 시작된다. 20명 정도의 규모를 가지는 학과 조직의 연구분야가 서울대학교 전체(전임교원만 2,200명을 상회한다) 구성원 중 대다수가 다루는 연구분야와 겹치게 되는 것이다. 융합과학부라는 작명으로부터 야기되는 문제 중 주요한 몇가지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융합과학부의 coverage가 넓기 때문에 오히려 타 학문 분야와의 교류가 어렵다. 교류라는 것(예: 구성원의 이동, 학문 단위의 병합)은, 분야는 다르지만 그 위상/개념이 유사한 수준일 때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융합과학부의 경우, 대다수 기존 학사 조직의 연구분야를 포함하기 때문에 기존 조직과의 상승적(synergistic) 교류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즉, A라는 연구를 B 학과에서 진행하고 있는데, 이것이 융합과학(앞서 정의한 바와 같이 순수 기초과학이 아닌 모든 과학)이라는 넓고 모호하며 느슨한 범주에 속할 수 있다면, 이 A라는 연구는 융합과학부에서도 중복하여 진행할 수 있다. 이 경우, 융합과학부는 전체 대학당국의 세심하고 현명한 조율(coordination)이 있지 않다면, 한 대학의 다른 캠퍼스(예: 미국 University of California의 여러 campus)처럼 될 수 있으며, 이는 정상적인 상호 교류를 방해하고 연구자 집단의 서열화에 노출되기 쉽다. 즉, 본래 융합과학 및 학사 단위의 취지와 벗어나게 된다.
둘째, 융합과학부의 넓은 coverage에 비해 구성원의 수가 적어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구성원들의 연구 분야 간의 간극이 매우 넓거나, 아니면 융합과학의 일부 영역에 구성원의 expertise가 집중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두가지 모두 발생하게 된다.)
전자의 경우, 세부 학문 영역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융합과학부 내부에서 학문적 역량에 대한 peer review가 불가능하고, 학부(학과) 외부의 사람들에게 이를 전적으로 위임하여야 한다. 마치 구성원 한명 한명이 하나의 학과(심지어 단과대학)를 구성하는 것과 유사하게 되며, 이 경우 학문 단위 내부의 peer review에 학문적 역량 검증을 위임하는 기존의 학사 시스템과 맞지 않게 된다.
따라서 후자의 경우가 보다 일반적이나(즉 소수의 학문 영역(예: 전공)에 복수의 연구자들이 포진하는 형태), 이 경우 해당 영역이 기존의 학과와 유사한 역할을 하며, 대외적인 시각에서 좁은 일부의 영역만을 다루는 조직으로 인식되기 쉽고, 또한 실제로 그렇게 동작하기 쉽다.
결국, 현재의 작명이 학문적으로나 학사조직으로나 긍정적이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에, 해결책으로 다음을 제시한다.
첫째 대안으로는 융합과학부(및 융합과학기술대학원)의 명칭을 변경하지 않되, 이를 prestigious한 조직으로 만들고, 기존 학사 조직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싶은 우수한 연구자들이 순환파견의 형식으로 융합과학부에 합류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 혹은 기술적 이슈로 부각되는(emerging) theme을 가지고 있는 연구자 집단을 일몰형으로 융합과학부에 몇 년간 파견하고, 그 중 지속적으로 번창하는 분야는 새로운 학문단위로 독립시키고, 다른 (대부분의) 노력은 declare success and move on, 즉 그 때까지의 노력을 성과물로 인정하고 다시 기존의 학문단위로 복귀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대학이라는 조직은 새로운 연구분야를 지속적으로 발굴할 수 있으며, 대학의 구성원 또한 학내 조직 간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연구와 교육이라는 본연의 임무에 매진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emerging theme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expertise를 가지는 연구자들이 하나의 공간, 조직에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이 융합의 본질에 부합한다.
이는 대학당국의 적극적인 의지와 지원이 없다면 학과 및 단과대학의 이기주의에 함몰되어 불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 다른 단과대학 내 학사조직이 자신들의 조직으로 이적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도, 자신들의 조직 내에 있는 연구 집단이 타 조직(단과대학)으로 이적하는 것은 조직의 발전을 위해 허락할 수 없다는 인식이 공공연하게 퍼져서 일상적으로 언급되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해법은 불가능하다.
두번째 대안으로는 융합과학부의 coverage를 좁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융합과학부의 이름을 융합학과로 바꾸고, 융합의 방법론을 연구하도록 역할을 부여한다면, 학과의 mission도 명확해지고 다른 학사조직과의 이질감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융합과학기술대학원이라는 융합학부를 포함하는 조직(틀)은, 단일 단과대학의 범위를 벗어나는 연구(예: 협동과정 및 연계전공의 일부)를 전개하는 연구 그룹들의 울타리로서 추가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2019년에도 유효한, 사회의 큰 화두는 4차 산업혁명이다. 2000년대 후반에는 융합이라는 단어가 지금의 4차 산업혁명과 같은 파급력이 있었다. 사회적 요구에 응답하는 차원에서 융합이라는 단어를 학계가 차용했던 것은 일견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기존 학제의 구성원들과 위상이 상이한 학문 단위를, 학과 및 단과대학이라는 울림이 오래 지속되는 울타리로 신설하는 것은, 보다 신중하고 세심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